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의 북벌 (문단 편집) === 2차 북벌(228~229년) - 진창성 [[공성전]] ===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nje3uirFqS1sm83a2o2_540.jpg]] 1차 북벌의 실패 이후, 위는 오를 공격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대사마 [[조휴]]의 위군이 [[오(삼국시대)|오나라]]에게 패배하면서 제갈량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다. 이 당시 위나라는 조휴/사마의/가규 등으로 오를 정벌하려 했었는데, 조예는 장합에게 관중의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가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다. 제갈량은 손권이 조휴를 격파하니 위군이 동쪽으로 내려가 관중이 허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리하여 관중의 압박이 사라지자 제갈량은 2차 출병을 개시한다. 하지만 2차 북벌은 제갈량이 노리고 있었던 북벌이라기보다는 석정 전투의 결과를 보고 1차 북벌의 여력을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228년 가을, 제갈량은 제2차 북벌을 감행한다. 조진이 예상하기론 제갈량의 전략적 목적은 관중을 얻는 것이었는데, 한중과 관중 사이의 교통의 요지인 진창이 그의 목적이었다고 판단했다. 이곳은 동한 [[광무제]] 때, 공손술의 수하 정언이 군을 이끌고 한나라 장군 풍도와 싸웠던 곳인데 노선은 한중 → 산관 → 진창길이었다. 여기서 산관은 나중에 남북조 시대나 [[남송]] 시대 때 남쪽에 자리잡은 왕조가 촉 지역의 북쪽 경계선으로 삼은 대산관을 말한다. 한진춘추에서는 11월에 산관에서 싸움이 있었다고 명백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제갈량은 진창에 도착한 12월에 산관을 함락하고 진창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위나라의 대장군인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패했기 때문에 재침한다면 틀림없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228년 봄에 학소에게 진창에 성을 쌓게 했다. 228년 11월 제갈량은 후출사표를 올리고 이후 산관(散關)의 싸움이 있었다. 228년 12월, 제갈량은 산관을 통과하고 진창에 도달한 제갈량의 북벌군은 진창성의 1천여 명과 마주하게 된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은 동쪽으로부터 구원군이 급히 도착할 수 없다 생각해, 진창성을 뚫으려 했다. 하지만 진창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인 [[학소]]는 그 자신이 유능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진창성을 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에 제갈량은 학소를 항복시켜 싸움 없이 진창을 점거하려 했다. 그는 석비채(石鼻寨)라 불리는 영채를 건설하여 진창성과 대치하는 한편 학소의 고향 친구인 [[근상]]을 세객으로 삼아 학소를 설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소는 배신한 장수의 집안을 적몰시키는 것이 위나라의 법률임을 내세워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근상이 다시금 학소의 마음을 돌리려 애를 썼지만, 다시 찾아온 그에게 학소는 활시위를 당기며 "나는 경을 알고 있으나 이 화살은 경을 알지 못한다"고 선고함으로써 대화의 여지는 없음을 명백히 했다. 마침내 근상을 통한 회유가 실패로 돌아가자 제갈량은 곧장 공성에 나섰고 쉴새없이 20일간 그 당시 사용할수 있는 모든 공성기술-운제, 충차, 정란, [[참호]] 메꾸기, 성벽 기어오르기, 땅 파기-을 동원해 진창성에 공격을 퍼부었으나 학소의 농성에 막히고 만다.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진은 [[비요]]를 파견했고, 조예도 장합을 불러 수도와 황궁을 지키는 남북군(南北軍) 3만을 딸려 보냈다.[* 당시 관중의 군대를 오나라 정벌을 위해 차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북군을 보내야 했다.] 장합은 제갈량이 학소의 농성에 막힐 것이라 예상하고, 조예가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진창을 점령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장합은 제갈량이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도주했을 것이고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이라고 대답했다.[* 이를 보아 제갈량이 형 제갈근에게 언급했던 진창성 공성전의 진짜 목표인 형주의 위군압박을 해소시킨다는 목적을 장합은 간파했었던 듯 싶다.] 이렇게 말했어도 장합은 진창을 서둘러 구하기 위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했고 남정에 도착하자 결국 장합이 예견한 대로 제갈량은 철수한다. [[왕쌍]]이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오자 제갈량은 바로 반격하여 참했다. 진창성 공성전의 기간은 20일 정도고 3차 북벌이 바로 이듬해 1월에 이뤄진 걸 보아 단순히 진창 공략이 목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진창 함락 여부는 관계없이 위군의 시선을 진창에 몰려있게 한 뒤 무도, 음평을 공략했다는 것. 실제로도 성공했기에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다. 진창 공방전이 본격적인 북벌의 장이 아니었음은 당시 촉군의 군량 사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촉군은 진창 전투 경과 불과 20일이 지났을 뿐인데 군량이 부족하여 퇴각했다고 기록은 말한다. 당시 촉한에 큰 기근이 있었다거나 식량 사정이 갑작스럽게 나빠질 만한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는다. 실제로 진창 공방전 이후 바로 벌어진 229년 초의 무도, 음평 공략전 당시의 촉군은 이렇다 할 장애 없이 너끈하게 군사행동을 소화해냈다. 그렇다면 진창 공방전 당시 촉군의 '20일치 군량'은 단순히 촉군의 제반 사정이 좋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갈량의 계산 아래 적재된 소모 비용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제갈량이 당시의 출병을 동년 초의 전역과 비등한 수준으로 확산시키려 했다면 행군과 전투 과정을 합쳐 한두 달이 될까 말까 한 군량만을 가지고 실행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228년 말 당시 제갈량의 기획은 그의 대전략적 목표인 옹양주 공략과는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갈량은 위나라의 주력군이 동쪽으로 가자 출병을 단행했다. 현지 사령관이었던 [[조휴]]는 몇달 전만 해도 촉한을 견제하던 [[사마의]]와 [[장합]]까지 강동을 향해 몰려간 것이다. 제갈량은 이것을 순수하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만 여길 수는 없었다. 위군이 전력을 집중해 강동을 공격했다가 동맹 세력인 오나라의 군사력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그에 따른 악영향은 고스란히 촉한으로 돌아올 것이 아닌가? 때문에 제갈량은 촉군이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의 제한을 두면서도 위군의 주의를 관중으로 환기시킬 만큼의 견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공세에서 제갈량은 오나라에 쏠린 군세를 관중으로 견제할 목적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당시 제갈량이 강동에 있던 형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갈량은 진창 진출의 실제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양소곡(綏陽小谷)은 산세가 험하고 물줄기가 얼기설기 흐르고 있어 행군하기에 어려운 곳이지만, 지난날 순찰병들은 이 요긴한 길을 통해 가고 오고 하면서 드나들었습니다. 지금 전군(前軍)으로 하여금 나무를 베고 이 길을 닦아 이로서 진창으로 향할수 있습니다. 이러면 족히 적군의 세력을 잇달아 끌어당겨 둘 수 있으므로, 저들이 군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행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 >제갈량집[* 수경주 권17 《위수(渭水)》에서 인용.] 수양소곡은 진창 정남쪽(포야도 위쪽)에 위치해 있는 골짜기로 제갈량은 여기를 통해 진창을 정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을 정비함으로서 진창을 견제할 수 있었다. 위의 중국역대전쟁사 지도에도 나오지만 1차 북벌 당시 기곡에서 포야도로 나온 조운과 등지가 진창과 미를 동시에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아마 이때쯤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2차 북벌 때는 진창고도로 가 산관을 함락함과 동시에 이곳으로 군사를 진군시켜 진창을 공격하는 데 사용한 모양이다. 여기에 서남쪽 산관과 연결된 진창도는 무도, 음평으로도 통한다. 따라서 제갈량은 우선 강동으로 쏠릴 위나라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진창으로 위군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옹, 양주를 공략하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관중이 우선 순위인 것처럼 속여[* 실제로 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위군의 시선을 돌리겠다는 복합적인 의도로 진창을 향한 진군을 결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조예는 강동 정벌에 동원했던 장합을 급히 소환하고는 남북군을 그의 지휘에 맡겨 진창을 구원케 했으니, 목표했던 의도대로 된 셈이다. 물론 적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게 해야 하고 진창을 차지하는 것도 촉한에게 전략적 이점[* 진창도를 통해 한중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받으면서 장안에서 오는 위의 공세를 막을 수 있고 나아가 진창의 일부 부대는 기산을 통해 올라가는 촉의 군대와 합류하여 량주를 공략할 수도 있다.]을 주니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심정으로 공략을 진행했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은 동쪽으로부터 구원군이 급히 도착할 수 없다 생각하자, 아예 진창성을 뚫으려 했기도 했다. 제갈량의 2차 북벌은 삼국지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는 11월에 산관의 싸움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고 삼국지 위서 명제기에는 228년 12월에 산관을 넘어와 진창을 공격하고 있었다고 써있는 반면에, [[조진]]전에는 다음해(229년) 봄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12월이 거의 다 끝날 때쯤에 넘어와 20일이 지나는 동안 공성하는 동안 해를 넘겨 1월 봄이 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